Dora/나의 이야기

[국동] 영천경주나드리(1)

만통만통 2014. 7. 29. 21:18

누군가 불러주는 이 있어 좋고..

이렇틋 기억에 남길 나들코스, 때때마다 잘 짜주는 착한 친구가 늘 곁에있어 더더욱 좋고..

아직은 이에 화답할 여력이 주어지니, 내 삶이 가히 축복의 삶이로고.. 어이 이보다 더한 즐거움 바랄쏘냐.

금수강산^^ 머무는 곳 그 어디던 그곳만의 풍경들 담고 느껴보고..

평소 익숙한 곳이라 여겼건만, 잘 알지못했던 것들.. 다시 찾아보는 쏠쏠한 재미에 하루시간 어찌가는지도 몰랐었는데~~

 

그날의 착한 답사행로^^ 고히 남겨둔다.

#영천,임고서원-경주, 교촌마을(최씨고택..향교)-계림-월성*석빙고-첨성대-동궁,월지(안압지)-불국사-양남 읍천리,파도소리길-감포,만찬(가자미&)

 

첫 발길은, 1980년 새로이 건립된 영천 '임고서원 臨皐書院'이다.

수일전 TV드라마 '정도전'으로 더욱 부각된 고려의 마지막 충절 '포은' 선생을 만난다.

임고서원은 1553(명종8) 정몽주鄭夢周의 덕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창건.. 이듬 해 사액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 1603(선조36) 현 위치에 다시 지음. 1643(인조21)에 장현광張顯光, 1787(정조11)에는 황보인皇甫仁을 추가로 배향. 1868(고종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 1919년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왔다. 1965년 정몽주의 위패만을 봉안하여 복원, 2001년 황보인의 위패도 다시 배향. 1980년 정부 보조로 현 위치에 새로운 서원을 건립하여 신,구 서원 2개 구조로..  -향토문화전자대전-

 

옛 서원 앞, 수령 500년 은행나무(높이 20m, 둘레 6m)..

본래 임고서원이 浮來山에 있었을 당시 그곳에 심겨져 있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 심었단다.   

 

임고서원 정문, 영광루란 누각 아래 외삼문인 경앙문이..

 

서원, 보아하니 한 눈에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라..

외삼문 들어서면 한가운데 講學공간인 興文堂.. 처마에 <임고서원> 편액이 걸려있고, 배향 공간은 그 뒷편으로~  

 

백로가 白鷺歌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 마라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淸江)에 됴히 씻은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

<쓰러져가는 고려의 운명을 다시 회복시키려 애쓰는 아들을 염려하며..아들 정몽주에게 지어준 어머니(영천 이씨)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

 

 

(가설) 선죽교 善竹橋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며 저런들 어떠료..' &  포은의 답가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단심가'가 떠오른다.

선죽교는 북한땅, 개성시 선죽동 자남산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로 옛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이다. 고려 태조가  919년 축조. 선죽교는 1392년(공양왕4)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 의해 이곳에서 철퇴를 맞아 숨지게 한 사건 이후 유명해진 곳으로.. 선죽교 石材중에는 부근 妙覺寺에서 나온 다라니당陀羅尼幢 일부가 끼어 있으며, 다리 동쪽에 선죽교란 3자가 한석봉의 글씨로 씌어진 가 있고, 다리 서쪽에는 碑閣 안에 1740년(영조16) 어제어필 포충비褒忠碑1872년(고종9) 어제어필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또 부근에는 1641년(인조19) 부임한 유수 목서흠睦敍欽이 건립한 읍비泣碑가 비각 안에 있는데 여기에는 '일대충의만고강상 一大忠義萬古綱常'이라 새겨져 있다. 이 읍비 앞에는 1797년 유수 조진관趙鎭寬이 찬한 녹사비錄事碑1824(순조24) 유수 이용수李龍秀가 찬하고 신위申緯가 쓴 녹사비도 있다. <펌> 

 

 

늠름한 자세의 임고서원 은행나무! 신,구 서원 배경으로 한컷 더하고..

 

'조옹대釣翁臺-무괴정無愧亭' 용연 위 정자 배경으로

500년 은행나무 잡아 '東方理學之祖(理學=性理學)의 유적 풍경'.. 담아둔다.   

 

 

한 채 정자에 방향따라 조옹대/무괴정 2개의 편액 걸렸으니..

앗뿔사! 미처 담아두지 못한 안내판 글 <조옹대釣翁臺와 용연龍淵> .. 찾아 고히 남겨둔다.  

포은圃隱 선생은 호수의 물고기를 보며 연비어약鳶飛魚躍을 말씀하셨으며, 여헌旅軒 선생은 임고서원 중건 상량문에서 조옹釣翁이란 대가 시냇가에 있는 것은 아마도 은거하신 초지初志일 것이다.’ 라고 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은 포은 선생께서 낚시를 즐겼다 하여 조옹대釣翁臺라 부르고, 또 선생이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용이라 하여 조룡대釣龍臺라 부르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연못은 용연龍淵이라 불렀는데 이번에 복원을 하고 울진 금강송 아래 자라던 토종 잉어를 분양받아 금강金剛이라 이름 지은 뜻은 포은 선생의 시 호중관어湖中觀魚모든 것이 팔팔한 물고기 같네[물물진성발발어物物眞成潑潑魚]’ 에서 찾으리라.

 

'무괴정無愧亭'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그런 뜻이란다.

 

조옹대에서 임고서원 전경, 옛 것과 새로움의 공존.. 

 

오름계단 말고 뒷 계단 내려서면 '포은 유물관 ..충효관' 건물이 이어져 있고..

정자 아래쪽엔 '용연'.. 어느날 TV서 만난 직벽절벽 낙수 풍경이 제법이던데~ 미처 눈돌릴 여유없어 못보다니.. 억수로 아쉽당!!  

 

 

 

발길은 신라 천년고도 '경주 교촌마을'로 방향잡아~

경주 교촌마을은 신라 신문왕2년(682)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

고려 때는 향학으로,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진 신라시대의 국학은, <가이드 왈> 지금의 '서울대학교'라나..

이곳 교촌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향교말고도 원효와 요석공주가 사랑을 나눴다던 '월정교 & 요석궁'에다  

12代 400년간 만석꾼이자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경주 최부자'를 쉬이 만날 수 있는 곳이라..

 

<한국토기 전시관.체험장> 이곳서만 만날수있을 전통 토기들은 눈팅으로..

 

발걸음이 자꾸 뒤로 땡긴다.

<토기공방> 물레-성형-장작가마 등등 전통 토기 제작.. 눈팅마저 제대로 할 수 없으니~ 슬픈 짐승꼴인 내가 보인다.

 

교촌마을 전통 한옥길에.. 한국토기 기능 전승자의 집이라~

 

'동도국악원' 황토골목길에.. 고작, 기웃거려보는게 전부라여. 

 

전통문화체험장 골목이라선지.. 바깥, 공예석물들이 잠시 쉬어가라 반기듯 하더라.

 

 

한정식韓定食 '명가名家'

코스요리; 3만,5만,8만 / 연잎밥 정식 & 비빔밥(전,묵무침포함)..  맛은 어떨꼬??

 

경주교동된장 (교동 교촌길 39-19 )

*된장이람^^ 고향의 맛. 둘러둘러앉아 달게 퍼먹던 된장국 밥상이 생각킨다.  

 

 

# 정성담긴 가이드 자료^^ 고히 남겨둔다.

<경주최부자>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특권계층의 사회적 책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집안이 경주 최부자다.

이 집안의 모토는 바로 둔차鈍次였다. 둔차란,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버금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當不三代 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듯이 부와 권력은 고금을 통해서 오래도록 유지해나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최부자집 역시 가실소완복(家室少完福; 집안에 완전한 복을 갖추기는 힘들다는 뜻)이란 말처럼 후손이 없어 양자를 들이기도 하였고 과거에 낙방하는 代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안이 오랜기간 부와 명예를 지키며 남들로 부터 칭송을 받아온 연유가 무엇일까? 

최씨 집안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집안을 다스리는 제가祭家의 가훈 '육훈六訓'과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가훈인 '육연六然'이 있다. 

'六訓'은 *진사 이상 벼슬 하지마라. 만석 이상 재산 모으지 말며 만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땅 사지마라. 과객은 후히 대접하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동안 무명옷 입어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내용으로 되어있고. '六然'은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자처초연自處超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대인애연對人靄然)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유사감연有事敢然)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득의담연得意淡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실의태연失意泰然) 이다.

일반적으로 '경주최부자집' 하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대로 경주 교동에 소재해 있는 '교촌댁'을 일컫는다. 그러나 최부자집의 집안 내력을 사전에 알아 보려면,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한 '충의당忠義堂'을 먼저 찾아가야 한다. 경주최부자는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재경 최국선으로 부터 28세 손인 문파 최준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 말이다. 

 

교동법주校洞法酒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다호) 눈팅..

경주교동 최씨고택崔氏古宅 (중요민속자료 27호) 들어선다

 

조선조 300여년 간 우리나라 대표적 명문가! .. 최씨집안의 '육훈 & 육연'을 상기하며 내 살아갈 삶의 지혜^^ 돌아보는 시간 갖는다.

2005년 복원됐다던 사랑채 공간인감.. 마당 불밝히는 정료대에다 '둔차鈍次'란 편액이 눈에 확 들온다.

둔차란?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버금감을 나타내는 말이라던,.. 

 

사랑채 지나 안채 뒷편으로 별당?? 제례공간인 '사당'일듯..

 

사랑채 뜰, 작은 평수에 맞춤인듯 석연지石蓮池 하나. 꽃인듯 잎인듯 제나름의 수생식물

부들?물칸나? 이도저도 아니다. 하기사 이름이 아무려면 어떠랴.. 한때 눈만 즐거우면 되는게지.. 

 

 

최부자 가문의 대중화된 가정 밥상! 가장 한국적인 맛과 멋^^ 풍겨낸다던 '요석궁'

그러저러의 세월이 지금까지도.. 그저 생각뿐인 최부잣집 전통음식 맛! 언젠가 한번은 그렇게 다짐해둔다.

 

 

<최가밥상> 작년 5월, 금오봉-칠불암 산행 후 만찬^^ 그때만해도 제법 쌩쌩했는데~~

그날의 느낌! 옮겨둔다. 옛부터 최부자집안 잔치나 찾아오는 손님들께 내놓턴 손님상으로,

선조들로부터 전해내려오는 고유 레시피에 근거하여 조리된 1인 상차림이라나.. 조금 비싸다 싶다면 깍듯한 친절에다 정원 조경으로 땜하면 될듯..

 

<월정교 月精橋> 사적 457호

경덕왕 19년(760) 신라왕경 서쪽 지역의 주된 교통로로 건립. 고려 충렬왕 6년(1280) 중수.

아직은 공사중이다. 옛적, 원효와 요석공주의 주요 데이트 코스였다나..

 

옛적 건널길은 징검다리로 교체.. 요런풍경도 한 풍경으로 잡아두고..

 

'풍악'이란 상호가.. 도보길, 술밥 거석하고접은 충동이~

이곳 막걸리 역시 최씨집안 내림술이란다 

 

때맞춰 교촌마을 들머리 육각정 찾아.. 점심타임^^

17代 회장단의 열정! 정성!! 새벽잠 설쳐가며 마련했다던 회장사모님의 전~ 찌짐맛에 다른음식 눈돌릴새 없고..

한 상 잘차려준.. 님네들 노고에 늦게나마 큰 박수를 보낸다네.  

 

충분한 술밥 쉼,

그리고~ 도보팀 & 차량팀으로 나눠져.. 껏 즐기기

크게 마음묵고 도보팀따라. 오후의 첫걸음 '경주 향교(경북 유형문화재 191호)' 유적 들어선다.

옛 우물인듯.. 얼핏 보기에도 그 규모가 대단타.

 

경주향교의 건물 구조는 여늬 서원과는 달리 '전묘후학' 배치로..

임진왜란 때 불 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을 비롯한 제향공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을 비롯한 강학공간을 원래 모습대로 고쳐지었다 한다.

뒷채, 강학공간인 '명륜당' 건물이다. '전통문화유산 체험관광 경주향교 입소' <프랭카드>가 눈에 확 들온다. 

 

앞쪽, 제향공간 '대성전' 건물이다. 회장님의 국사강론! 들리난닷..

향교와 서원의 제사 대상에 대해, 늘 헷갈리기에.. 똑똑한 말씀 옮겨둔다. 

<성균관과 '향교'는 모두 문묘를 두고,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에 대한 제사이고,

'서원'은 대개 지역과 관련있는 선현들을 정해서 지내는 제사이며, 간혹 공자를 모셔 제사 지내기도 했다고라.> 

[내생각] 공자에 대한 제사 풍습! 이제는 바뀌어야?바꿔야 혀.   

 

 

방향잡아 '석빙고' 찾는 도보길에 겯눈질로 만난 사적19호 '계림'

김알지의 설화를 간직한 이 유적지에 '찬기파랑가' 비석 .. 무슨 말인감?? 찾아 옮겨둔다.

신라 경덕왕 때 '충담사'란 승려가 화랑을 찬양하기 위해 지은 10구체 향가로, '기파'의 곧은 기개와 품성을 담고자 했던 신라인의 노래라고라.

 

 

 

월성 자하 유구(2006년 탐사) 안내판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년경) 해설판* 신라 시조 혁거세가 갑자년(서기전57)에 개국하고 국호를 신라로 하였으며,

파사왕 22년(서기101)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 혹은 재성이라 하였는데 둘레가 1,023보였다.

 

가시거리 내 向'석빙고' 잘 생긴 소나무들.. 조금은 덜미치지만, 이런 솔나무를 황장목급이라 매김해둔다. 

 

드뎌! 보물 66호 '석빙고' 고히 담아둔다. 얼음창고라 출입구의 서늘한 기운이.. 글고 세곳 지붕 환기구

 

 

우째 요즘은,

글 한 편 완료하기가 쉽지 않다.

아직도 갈길은 먼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