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ra/나의 이야기

[도라] 서울투어(국립민속박물관&경복궁)

만통만통 2013. 7. 17. 19:28

천년 고도 경주를 일컬어 노천박물관이라 한다지만,

한양의 중심 서울 종로구는 눈 가는 곳곳 모다 박물관 급이라~

걷고싶은 종로길 '북촌' 탐방에 이어

'경복궁' 가는 길.. 담아두고싶은 그림들 모다 담아둔다.  

 

<북촌박물관> 구한말의 義人, 손병희孫秉熙(1861~1922) 선생 집터. 

'역사 속으로' 님은 구한말 天道敎 지도자이자 3,1운동때 33인.. 본관은 밀양. 본래 이름은 손응구孫應九, 망명 중 사용한 가명은 이상헌李祥憲.

*조선 말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창도한 '東學 농민운동'이 외세에 의해 진압된 후.. 제2대 최시형崔時亨에 이어 도통은 제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에게 전수된다.  손병희는 초기에 정치와 종교 간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여러 개혁적 시도를 감행했으나 실패, 도리어 일제에 의해 역이용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정교분리 원칙을 내걸고 1905년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새로운 교리와 체제 확립. 

동학의 산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수운회관 水雲會館'  1972년 준공된 천도교 상징 건물, 3호선 안국역에서 운현궁 바로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던데~

 

관광안내소 '함께라서 행복 합니다.' 다정한 표어에 잠시 머문다.  

 

<종친부터 宗親府址> 종친부는 조선조 왕의 친족관련사무 담당 부서.

고려 이래 종친은 작위와 녹봉만 받을 뿐 관직을 맡을 수 없었으므로, 일반 관직체계와는 별도로 종친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 운용했고,

종친부는 역대 왕의 계보와 초상을 모시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는 기능도 담당했다고라.  

 

[국립민속박물관]  폭염에 땀 훔쳐가며 길건너편서 한컷!   

 

끝이 어디쯤일지.. 아리33한 <박물관>담장길=<경복궁>성벽길. 

가을이나 겨울 즈음엔 한층 더한 풍경으로 채워져 있을 듯..

 

<솔이&도솔> 동심 발동! '말타기놀이' 요런 놀이는 전국이 다 같은 것인가베..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동자석..벅수..문인석

                             * 동자석= 사찰에 안치하는 신상 또는 무덤 앞에 있던 문인석의 변형으로 세워졌던 석상으로, 신앙의 대상이자 수호 기능.

                       * 벅수= 장승의 다른 이름으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 등에 세워 경계선을 표시하거나 수호신 역할을 하는 민간신앙의 상징물.

                       * 문인석= 죽은 이를 지키기 위해 무덤 앞에 세우는 석상으로, 머리에 복건을 쓰고 손에 홀을 지녀 문관임을 나타내며 한 쌍을 이룬다. 

 

제주만의 명물! 정주목과 정낭

제주도에만 있는 것으로, 집안에 들어가기 위한 출입로인 올레 입구 좌우에 돌이나 단단한 나무로 설치하는데,

긴 나무로 만든 정낭을 걸칠 수 있도록 정주목에 3개의 구멍을 뚫어 놓는다.

정낭을 정주목의 뚫린 구멍에 걸쳐둠으로써 말&소의 출입을 막고 주인의 외출 여부를 표시하는 구실을 한다.

주인이 잠깐 이웃집 갈 경우엔 맨 아래 구멍에 정낭을 하나만 걸쳐두고, 반나절 집을 비울 경우는 2개, 먼 곳으로 '마실' 갔을 때에는 3개 모두를 걸쳐둔다나.  

 

[국립민속박물관] 어디선가 봤음직한 건축물이긴 한데.. 5층탑이라~ 쉬이 감이 잡히질 않는다.

우람한 건물 구조 중 아랫도리는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글고 탑신, 보주 등은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등

우리나라 전통 사찰 건축 양식을 현대감각으로 응용하여 재현한 것이라 한다. 

아랫도리는 그렇다치고, 과연 요런 주소불명 건물이.. 국립민속박물관 상징 건축물로 합당한 선택이였던감?

 

 

'국립민속박물관 탐방'.. 참고삼아 간추려둔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대한민국의 대표 생활사 박물관이자 국민들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문화와 교육의 산 터전.

*경북궁 터 북편에 위치한 '국립민속박물관'.. 역사를 살펴보니,

1945. 국립민족박물관 창립(美군정청68호) 1946. 故 石南 송석하선생 외.. 남산기슭에 '국립민족학박물관' 개관(일제강점기 시정 기념관건물)  대한민국정부수립후 1949. 국립민족박물관 직제제정 1950. 국립박물관의 남산분관으로 통합 흡수 1966. 한국민속관개관(경복궁내 수정전, 문화재관리국 소속) 1975. 경복궁내 현대미술관이 덕수궁으로 이전하자 이 건물을 인수하여 한국민속박물관 개관 1979. 문화재관리국 소속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속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직제개편 1992. 국립중앙박물관 산하에서 문화부 직속기관 <국립민속박물관> 독립, 직제개편 1993. 현 건물(구 국립중앙박물관 청사)로 이전개관 1993. 문화체육부로 소속변경 1998. 문화관광부로 소속변경 2008. 문화체육관광부로 소속 변경

- 특성 ; 조선시대 궁궐 경복궁내에 있음으로 조선왕조의 문화와 전통 민속 생활문화를 함께 접할 수 있고, 일반적 박물관들이 엄선된 유물 위주 전시에 중점을 둠에 비해 유물 하나하나가 당시에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사람들의 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생활사박물관.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들 재현, 전시와 연계해 가능한 관람객들이 체험할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생동감 있는 우리 민족의 삶을 보여주고자 함.

*경복궁은 유료관람 - 경복궁 매표소에서 입장권 구입이라.. 그게 가능한감? 국립민속박물관과 경복궁 사이엔 경계가 없던데~

 

 

 

 

오촌댁 梧村宅

* 이 집은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 1리에 있던 것을 기증받아 옮겨 지음. 해체 과정에서 '道光28년戊申3월2일申時입주上樑同日時'라 적힌 상량문이 나와 1848년 지어진 것으로 확인. 가운데 마당을 가진 ㅁ자 형식으로 지붕의 용마루가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안채와 사랑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특징.  4개 방(안방 上房 사랑방 문간방)과 안마루(안대청) 사랑대청(사랑마루)이 거주공간이다. 이외에 정지(부엌)와 수장공간으로 도장방과 창고방이 있다. 외부 출입문은 뒤쪽을 제외한 세 방 모다 가능하다. 뒷마당에는 장독대를 두었고, 오른쪽 마당에는 디딜방앗간과 우물, 뒷간(변소)을 배치. 이 지역에 지어졌던 조선후기 중상류계층 전통한옥의 유형을 잘 보여주는 집이라 한다.

 

 

국립민속박물관 들어서서, 타이밍상 야외 탐방뿐..

기냥 가기 무엇하야 일상에 유익할 '박물관홈피글' 간추려 남겨둔다.  

- 한국의 12지 -  

인간은 세상에 머무는 동안 희노애락의 과정과 생로병사의 순서를 겪는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백년을 살기 어렵다. 짧은 인생 속에서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바라는 마음.....

우리는 선조들의 질박한 염원이 살아 숨쉬는 이 석조 상들을 통해 우리의 심성이 스며있는 열 두 띠 동물들을 만나게된다.

'한국의 12띠 동물'

# 쥐와 물, 불의 탄생설화 : 천지가 개벽 하고 미륵이 태어났다. 러나 물과 불을 구할 수 없어 생식을 하던 미륵은 생쥐에게 물과 불을 구하는 지혜를 얻었고 그 후로 세상은 참된 생명력을 띠게 되었다. 함경도지방 창세가에 나오는 이 신화는 미물인 생쥐를 인간 세상의 기본인 물과 불을 구해준 창조자로 묘사하고 있다.

# 12지의 정의 : 자연의 일부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동물과 함께 존재하면서 현재의 삶을 영위하고 또 미래의 희망을 품는다. 문명 속에서 동물은 인간의 식량자원-교통수단-농경목적 & 신앙의 대상으로도 여겨졌는데,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영매체이자 인간의 운명과 성격을 결정짓는 상징으로서 오랫동안 우리곁을 지켜왔다. 그 중 우리의 문화와 정서를 읽을 수 있게 하는 주요 모티브인 열두 동물들을 일컬어 십이지라 한다.

# 12지와 운명 : 태어나면서 운명처럼 부여받는 띠. 사회가 급변하고 삶의 외양이 바뀌더라도 우리들 잠재의식 속에 머무르며 내면세계를 형성하는 띠. 열두띠로 우리는 삶을 시작한다. 왜 돼지는 복을 부르고 개는 헌신을 상징하며 소는 생구라 부르는가? 한국인들이 동물에 투영하는 이미지는 민족정서를 대변하고, 띠동물로 대표되는 동물은 개인의 운명과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를 밝히고 이해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 인간과 동물의 역사 : 공포의 대상이자 먹을거리이기도 했으며 신앙의 대상으로도 나타나는 동물들. 이들은 여러 유물과 유적을 통해 고대인들의 의식세계를 읽는 바탕을 제공한다. 청동기시대의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에서 묘사된 다양한 동물들의 모습과 움직임은 동물이 일상의 대상으로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동물상징인 토우는 신앙의 표현으로서 무덤에 묻었는데 죽은 자의 의식을 담은 신라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 한국의 12지의 변화 : 우리나라에서 십이지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십이지 개념은 중국 은대에서 비롯, 이를 방위나 시간에 대응시킨 건 대체로 한대중기로 추정.

우리나라의 십이지는 시간신과 방위신적 성격이 강하다. 북방민족의 방위신 개념인 사신에 이어 신라의 12지상으로 이행되어 완성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12지인데, 십이지 동물은 시간과 방위에 따라 둥근 원으로 형상화되었고, 각 동물은 위치하는 곳에서 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는 수호신이다.

고려에서는 표현 방식의 변화는 있으나 호석으로 배치되어 능묘를 보호하는 기능은 신라의 예가 그대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능묘의 호석에 새겨 배치시키거나 무덤에 묻던 십이지상이 조선시대에 이르면 사라진다.

고려시대까지 능묘에서 나타나는 십이지상이 시간과 방위를 상징하여 동서남북 방향에 맞게 배치되고 능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를 갖던 것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말 양 호랑이상 만이 나타나는데 문인석과 무인석 뒤에는 석마를, 능의 좌우측에는 석양과 석호를 번갈아 배치했다. 말은 문인석과 무인석의 신하가 타는 승용동물로 새겨졌으며, 양과 호랑이는 수호동물을 상징하고 있다. 여기에서 12동물이 상징하는 의미를 시간과 방위의 개념을 도입하여 살펴보자.

# 한국의 12지의 상징 : 가장 먼저 자리하는 쥐는 뛰어난 번식력과 부지런함으로 다산과 부를 상징. 우직하고 순박한 천성으로 각별히 사랑받던 소, 산중의 왕이자 산신으로 추앙되어 다양한 산신도와 부적에 나타나는 호랑이, 귀여운 생김새와 함께 수궁가 별주부전 토끼전 등을 통해 지혜의 상징이 되고 있는 토끼, 열두 동물 중 유일하게 상상의 동물이며 불교를 보호하고 번창시키는 수호신이자 호국의 상징인 용, 허물을 벗는 속성으로 재생 불사 영생의 존재로 인식되어 생명탄생과 치유의 힘을 가진 뱀, 힘과 능력을 의미하여 지도자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 평화를 상징하고 무릎을 꿇고 젖을 먹는다하여 은혜를 아는 동물로 인식되는 양. 또 원숭이는 동물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재주 있는 동물로 꼽히는데 '서유기'의 손오공처럼 귀신을 쫓는 축귀의 힘을 가진 존재로 숭배되었다. 여명을 알리는 울음소리로 밤에 횡행하던 귀신을 일시에 지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닭, 오랜 시간동안 인간과 함께 살아오면서 인간에게 헌신하는 충복의 상징이 된 개. 마지막 띠동물인 돼지는 제의의 희생으로 바쳐지는 제물이자 길상의 동물로 복을 상징한다.

# 세계의 12지 : 다양한 상징으로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고 삶을 관장해온 십이지. 십이지에 대한 관념은 동서양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흔히 '십이지 사상'이 중국으로부터 비롯된 동양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으나, 아득한 옛날 중동지역에서 유입된 것임은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십이지'란 날.달.해(日月年)를 분간하기 위하여 창출해 낸 동양적 지혜라고라. 이집트 그리스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에 널리 편재한 십이지는 각 민족마다 별개의 명칭이나 표현방식을 띠는 동시에 보편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기원한 황도십이궁, 별자리와 풍뎅이, 사자 수양 새매 등이 포함된 바빌로니아의 동물상징, 악어와 홍합이 등장하는 이집트의 십이지 등이다.

각 민족의 특성과 행동, 의식이 반영된 십이지는 그 특수성과 함께 다원발생적인 문화양상을 보여준다.

# 삶과 죽음의 교차길 : 탄생의 경이로움과 세상을 떠날 때의 장엄함이 있는 길목... 여기서부터 열두띠 동물도 시작한다.

살아있을 때는 인생의 운명과 안위를 점치게 하고, 한해의 연운과 국운을 예견하게 하며, 때로는 풍년과 다산을 기원하는 제의나 주술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이처럼 십이지는 우리의 피 속에 흐르는 사상의 흐름을 보여주며 생활 곳곳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동물과 인간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식세계를 반영하여 마음 속에 깊은 무늬를 새기는 동물들. 땅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영매체이자 인간사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상징이 되기도 하고,  시대의 세계관을 대변하기도 하는 동물들은 오늘도 우리 곁에 함께하며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가져다준다. 

또한 우리 민족의 고운 심성을 전달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하겠다.

 

 

 

'경복궁 慶福宮

(역사 속으로) 조선의 다섯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든 궁궐.  태조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1395년(태조4) 완공된 경복궁은,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목멱산(남산)을 안산으로 삼아 풍수지리적 터잡기에서도 한양(서울)의 중심을 차지. 정문인 광화문으로 관청가인 육조거리(세종로) 조성, 그 연장선 위에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주요 궁궐건물들을 일렬로 놓아, 조선 왕조국가의 상징 축으로 삼았다.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란 의미의 '慶福'이란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나,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다시 개경 천도 등 조선건국초 혼란한 정치 상황 중 경복궁은 궁궐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가 세종 때에 비로소 이곳이 조선 왕조의 중심지로 서게 된다. 이후 확장과 중건을 거듭타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전소되고 만다. 그후 270여 년간 방치되다가 1867년 고종때 흥선대원군 지휘아래 새로 지어진다. 이 중건을 통해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하였지만 얼마되지 않아 건청궁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이곳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아관파천>으로 피신.. 단청의 색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시 빈집이 되는 비운을 겪는다. 이 '아관파천' 이후 조선 왕조는 다시는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라.

1926년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건물들이 철거되어 중심부의 일부 건물들만 남았고, 광화문을 비롯한 외전 일부를 헐어내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정면을 막기도.. 

이로써 조선 왕조의 상징 훼손! 조선의 자존심을 무너뜨렸으며, 정문인 광화문 또한 해체해 지금의 건춘문 자리 근처로 옮겨.. 광화문은 1990년부터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원래의 흥례문과 행각 복원.. 당시 남아 있던 중앙청 자리를 기준으로 세우다 보니 원래 경복궁 건물들의 선상에서 벗어나 삐뚤게 놓이게.. 2010년(광복 65) 드뎌 복원 완료. 

광화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 2층 월대 위에 장엄하게 서 있는..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공식 행사나 조회 등에 사용한 건물.

근정전 월대 난간에는 주작 백호 현무 청룡이 각 방위에 따라 새겨져 건물을 지키고. 근정전 뒤로는 임금의 사무실-사정전, 침실-강녕전, 왕비 처소-교태전이 이어진다.

근정전을 바라보고 왼편으로 나가면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경회루.. 인공 연못 위에 지어진 2층 누각 건물로, 현재의 목조 건축물 중 크기로도 아름답기로도 손 꼽히는 건물.

경복궁 탐방 중 꼭 봐둬야 할 곳은, 교태전 아미산과 자경전 장생 굴뚝으로, 굴뚝 원래의 기능적인 역할에 더하여 여성 거주 공간으로 미학적 요소도 함께 고려한 작품이라던데~  글고 신무문 북쪽 경복궁 후원 영역이 1960년에 '청와대'로 개칭되었다는 사실.. 

 

국립민속박물관에 이어 경계없이 곧바로

'경복궁' 북편 궁궐 끝채 건물,  고종을 위해 지은 궁 안의 궁 '향원정'에서 탐방 시작..

 

향원정香遠亭 & 건청궁乾淸宮 

고종 내외가 흥선 대원군의 간섭에서 정치적 자립을 위해 1873년 건청궁을 궁궐 안 북쪽에 별도로 조성. 침전인 곤녕합, 옥호루와 왕의 사랑채인 장안당 등으로 구성.

곤녕합은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된 역사적 비극의 장소~ 후궁영역의 뒤 정원으로 만들어진 연못 안에는 원래 취로정翠露亭이 있었는데 건청궁 창건시 그 자리에 향원정을 새로지어 건청궁 앞 정원이 되었다고라.

 

향원정香遠亭 *보물 제1761호

부정형의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들고 육각정자를 세웠으며, 원래는 북쪽으로 다리를 놓아 건청궁과 연결.. 다리는 한국전쟁때 파괴된 후 지금은 남쪽으로 놓여있다.

7~8월 백연 수련 연꽃 한창일무렵.. 이곳 향원정의 향기로울 그림 함 그려봤네여.  

 

 

건청궁乾淸宮 

역사적 비극의 장소 '곤녕합'  에잇!! 예의범절과는 거리가 한참 먼~ 무식 무지한 2% 왜넘들..

<명성황후의 비극>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작한다.

이에 친러정책을 구사하며 일제에 정면으로 맞섰던 명성황후는 건청궁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

1895.10.8(음력 8.20) 일본공사관 직원/일본군/일본깡패 합세,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능욕.. 찔러 죽이고 

그 시신마저도 녹산에서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건청궁 부속건물 <초양문 初陽門>  아침햇살~

장안당 동쪽문. 장안당과 곤녕합 사이 담장에 있다.

 

<함광문 含光門> 곤녕합 남문, 만물을 포용하야 ~

 

옥호루

1895년 일본넘들이 궁궐을 습격..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이 건물 곤녕합의 누마루인 옥호루였다고라.

이 사건 이후 건물은 한 동안 방치되었다가 철거되고 말았으며, 2006년 옛 모습대로 복원.

 

왕의 휴식공간 <장안당 추수부용루>

 

 

필성문 弼成門

장안당 앞 담에 있다. 뒤쪽으로 관문각觀門閣과 통하던 관명문觀明門과 취규문聚奎門.. 상단을 벽돌로 쌓은 門이며, 글씨는 돌에 새겼다.

이 필성문을 들어서면 추수부용루가 보이고, 바로 장안당이 보인다

 

 

열상진원샘

1395년 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던 왕궁의 샘. <열상진원> 글 새긴 우물 뚜껑은 1868년 경복궁 중건 때 만든 것이라고라.

샘에서 솟아난 물이 두 번 직각으로 꺾여 연못으로 잔잔히 흘러들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은 향원지香遠池에 드리워진 정자와 꽃나무의 그림자가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비치도록 하기 위한 것.

꺾어지는 水路는 둥근 돌로 통로를 만들어 흐르는 물이 더욱 생기를 띠게 한다.
향원지의 근원이 되는 샘이며, 경회루 연못을 거쳐 경복궁 밖으로 흘러나간다네여. 옛 조상님네들의 지혜가..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라..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요상한 이름의 <시무나무>  옛 과거길 길라잡이 나무란다. 

5리 쯤 거리에는 오리나무를 심고 10리, 20리 마다에는 시무나무를 심어 거리를 알아차리게 했다고라..

 

 

 우리나라 국민 누구나의 경겨운 고향집^^ 그이름  <장고醬庫>

궁중 연회나 제례에 쓰이는 醬類를 보관하던. 이 장고 풍경은 2005년 복원한 것으로 경사지를 활용한 계단식 장독대.

여기 전시된 독들은 2007년 전국에서 수집한 것으로 우리나라 '독' 옹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궁중의 장醬> 궁중의 장 담당 관청, 사옹원司饔院

사옹원이란, 조선시대 궁중에서 왕의 식사 및 궐내 음식물 공급 등의 일을 맡은 관청으로

.. 사옹방司饔房 1467년(세조 13)에 사옹원으로 개편되어 녹관祿官을 두게 된다.

주 업무는 왕가의 식생활에 필요한 물선을 관리하고 조리 가공하여 일상의 식사 및 연회식 행행식 제사식 등을 마련하여 올리는 업무를 담당.

따라서 대전과 중전에서 쓰이는 장류(간장 된장 고추장 등)는 어선 담당인 사옹원의 담당 사무로 추정.  

 

 

한국의 독, 옹甕

 

 

<예성문 禮成門>  '장고개방' 홍보물..

우리네 식생활, 있어야할 곳에 늘 있어왔던 고추장 된장 간장(꼬장 딘장 지렁)

'장'담그는 일들이 이젠 귀한 상거래로 우뚝 서있다.. 요즘들어 제대로의 구디기 딘장 맛본지가 까마득 혀.. 

 

진거문辰居門

 

강녕전 교태전 & 사정전 방향으로..

경복궁의 주산이라던 백악산(북악산) 배경으로..

 

만시문 萬始門

경회루 북쪽 담장의 문. '萬始'란? 語原은 주역-단전에서 유래..

'萬物資始'.. '만물이 의뢰하여 비롯하다'란 뜻이라고라.

 

 

 

# 경회루 즐감, 이해에 앞서 ..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의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

그러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  경회루 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

현재의 경회루는 고종 4년(1867)에 중건. 다시 지어진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소실되었음에도 경회루는 중건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왔다.

연못 주변에는 담장이 둘러쌓여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동.서.남.북의 담장이 철거되었으며, 2004~2005년에 각각 북쪽과 동쪽 담장 복원.

경회루로 가는 3개의 돌다리에는 벽사의 의미를 가진 동물상이 새겨진 엄지기둥을 놓았다.

경회루 중건에 앞서 이 건물의 공간구성을 역易의 원리에 기초하여 풀이한 글이 쓰여 졌는데 정학순이라는 사람이 적은 <경회루 전도>를 들여다 보면,

- 경회루가 불을 억제하기 위하여 육육궁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다고 적혀 있다.

6은 본래 8괘에서 큰 물을 의미하는 숫자이며 경회루를 구성하고 있는 공간과 구조부재의 개수 등이 6궁의 원리를 따랐다는 것이다.

경회루 축조에 응용된 우주의 원리를 <경회루 전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 따라 정리하면,

- 정학순은 경회루의 평면을 4방 3중 구조로 정의하고 이를 중국 상고시대에 나타났다고 전하는 신비한 도형인 河圖(주역의 기본이 된 그림) 모습이라고 적고 있다.

또 물과 불을 능히 다스리는 용 두 마리를 경회루의 연못 북쪽에 넣었다는 것이다. 북쪽에 용을 넣은 것은 생성되는 물로써 불을 제압하려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경회루는 바닥면적 933(282평)로 현존 목조건물 중 가장 큰 규모다.

2층 마루는 3겹으로 구성. 중심 3칸은 天地人을, 그 바깥 12칸은 1년 12달을, 가장 바깥의 24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하는 등 동양적 우주관을 건축으로 상징했다.

 

경회루 慶會樓 (국보 제2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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